나는 목표를 세우고 마음이 너무 앞서면
급하게 이것저것 하면서 스스로를 몰아세우는 성격이다.
그런데 머릿속으로 생각이 너무 많다보니
몸이 지치기도 전에 정신적으로 탈진하기도 한다.
너무 미리 걱정하고,
이미 실패까지 시뮬레이션 해봐서
최악의 상황을 대비하고 좀 덤덤해지기도 하지만
아예 도전조차 안할 정도로 지레 포기하기도 한다.
항상 잘하고 싶은 욕망은 크고
주변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고 싶어서
할 수 있는 것보다 많이 해본 다음에
그걸 내 기본 능력치라 생각하고는
그 다음에 그만큼 하지 못하면
스스로에게 가혹하게 비난하기도 한다.
작심삼일이다, 의지가 없다, 나약하다, 능력치가 이것밖에 안되는 거 아닌가,
불안과 의심으로 스스로를 못살게 군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내가 갖고 있는 나 자신에 대한 기대치에 비해
성과에 대한 (불확실한) 열매가 과대평가 되어 있어서
얼른 그 간극을 메우려고 성급히 노력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음이 급한 나머지
뭐든 차근차근하기 보다
빨리빨리, 얼른 기초를 마치고
소위 '나 좀 한다'의 영역에 빨리 도달하고 싶어서
매번 기초에 해당하는 부분을 빠르게 해치우려 했던 것 같다.
어렸을 때는 학습 속도가 빠르다, 기억력이 좋다 등
그거 자체로도 칭찬을 받을 수 있으니 좋았다.
중고등학교에서 배우는 수준이 대단할 학문이랄 것도 아니고
기초 전공 지식을 배울 수 있는 학업평가 같은 거였으니
사실 허겁지겁 집어 삼켜도 소화할 수 있는 수준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진짜 학문의 영역이나 실용을 위해서는
그런 식의 덤벙덤벙 날림 학습이 유효하지 않다.
처음 전공을 바꾸고 어려웠던 것도
다른 학생들이 최소 학부시절 갖춰왔던 기본 지식을
얼른 따라 잡아서 내 능력을 증명해보이겠다는 과한 욕심 때문에
성급하게 단면적인 지식을 빠르게 습득하는 것에 몰두했기 때문이다.
처음에 아는 체 하는 것에는 성공했더라도
결국 디테일한 부분에 대한 이야기로 들어가면
잘못 이해했거나 모르는 게 너무 많았고
그 결과는 스스로에 대한 비난과 자책으로 돌아왔다.
차라리 확실히 이해하는 부분만 끈질기게 파서
좁더라도 그 분야로 전문성을 갖추는 게 더 나은 전략이었을텐데도
자존감이 떨어지니 남들이 하는 게 훨씬 더 좋아보여서
다른 사람이 하는 연구를 기웃거리다가 시간 낭비하기 일쑤였다.
그래도 졸업장 하나로 어느정도 자존감 회복도 했다고 생각했지만
근본적인 습관 자체가 바뀌질 않았다는 걸 다시 느끼게 되었다.
현재 내 수준보다 높은 목표를 상정하고 달성을 위해 노력하고 매진하는 과정은
인생을 좀더 열심히 알차게 살 수 있는 보람찬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평생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겠다고 목표를 세웠고,
그 한 단계로 일본어에 도전하였는데 생각보다 외울 것이 너무 많아 놀라고
스스로 생각하는 기준은 높다보니 결국 다시 날림으로 공부를 하고 있었나보다.
사둔 책을 안보면 돈이 아까우니까 빨리 읽어야겠다는 마음에
읽으면 대강 아니까 하고 넘어가고, 또 나오겠지 하고 넘어가고,
이런 모양에 이런 문맥에 등장하면 이렇게 읽는구나 하고 넘어가고,
이런 상황에 이런 식으로 말하면 되는구나 하고 넘어가고...
얼른 해야한다고 생각하니까 이런 식으로 쌓여온 게 너무 많았다.
그래서 그저께 처음으로 아무 것도 안보고
기본적인 동사변화를 써보려는데 너무 헷갈리고 막막했다.
'이거였던가..? 문장에서 읽을 땐 그냥 알았는데.. 뭐였더라..?!?'
기초가 없이 모래성만 쌓고 있었구나, 정말 아차 싶었다.
그런 지식이다보니 당연히 단단하지 못해서 잘 들어가지도 않고
들어가더라도 금방 스르륵 사라져버리곤 했던 거였다.
근래 한자를 외우면서 계속 피곤하고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는데
사실은 일본어를 정말 잘하고 싶어서라기보다는
후딱 해치워서 끝내버리고 싶은 마음이었단 걸 깨달았다.
이미 마음이 콩밭에 가있는 공부니 즐거울리 만무했다.
탄탄히 기초를 굳히기보다는 대강 퍼담고 다지진 않고 있었으니..
이제라도 이 심각한 부실공사를 깨달아서 다행이었다.
다시 기초 책을 펴들고 문법을 공부하면서 마음이 차분해지는 걸 느꼈다.
마음 한켠에는 여전히 빨리 해야한다고 재촉하는 to-do가 쌓여 있지만
급하다고 대강 하고 넘기다간 다시 하느라 시간낭비를 불러온다는 걸 안다.
공부든, 일이든, 삶이든, 비슷한 것 같다.
내 앞에 있는 모든 숙제들 역시 얼른 해치우고 싶다고 날림으로 해버리면
그 무성의함에 대한 보답은 더 가혹하게 돌아올 것이라는 것을 말이다.
너무나 당연한 것인데, 마음이 앞서서 또 잠시 잊고 있었다.
제대로 안전장치나 보호장구도 갖추지 않고 급발진하며 달려가던 나를 멈추며
다시금 기초의 중요성을 되새겨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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